-


 "천러야, 잠깐만,"



 지성은 천러의 가방을 잡아당겨 기어코 천러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악. 지성이 힘을 그렇게 크게 것도 아닌데, 천러는 작은 비명소리 같은 것을 만들며 뒤쪽으로 주욱 끌려 왔다. 천러의 운동화 뒤꿈치와 지성의 운동화 앞코가 작게 부딪혔다. ! 하는 천러의 물음에 맞춰 지성의 손이 지퍼 소리를 만들었다.


 " 가방 문을 열어놓으면 어떡해,"

 "그랬나? 몰랐어!"

 "... 쏟은 없어?"

 "없어~"

 " 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바보야. 지성이 천러의 어깨를 작게 , 치면 그대로 천러가 고개를 젖혀 웃었다. 가방 주인은 정작 자기 소지품에 관심이 없는데, 주인도 아닌 지성은 천러의 가방 지퍼를 다시 열어 안을 확인했다. 지갑 있고, 필통 있고, 끊어진 열쇠고리도 다행히 있고, 사탕 껍질... 있는거야. 아휴 천러야. 이런 쓰레기는 제때 버리지. 지성은 그렇게 꾸중할 생각도 않고 천러의 쓰레기를 주머니에 찔렀다.


 " 대학교 처음 !"

 "나도."

 "완전 대박이야!"

 "? 넓어서?"

 "!"


 사람들도 대박이야. 고개가 호기심을 가득 담고 두리번거린다. 뭐만 하면 대박이란다. 사람들이 대박 많다는 뜻이겠지. 저들 곁을 스치듯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 행여나 천러가 부딪힐까 작게 걱정한 지성이 천러의 어깨를 쥐었다. 우리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자. 지성이 이끄는대로 구석까지 쪼르르 몰리던 천러가 뒤를 돌았다.


 " 기다려! 학교 구경 하자!"

 " 있으면 수업 끝난대."

 "그러니까 전까지 구경하면 되지."

 "그러다 잃어버리면 어떡할래."

 " 잃어버려~"

 "잃어버리면?"

 ", 박지성 겁쟁이."


 천러가 '겁쟁이'라며 지성을 흘겨본다. 익숙함이 가득해 푸스스 웃어 버렸다. 그래 천러야. 겁쟁이 할게.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자. 이제는 그렇게 혼나는 것에 충분한 면역이 지성이었다. 천러와 하복 소매가 스치고 맨살의 팔이 닿는 조금 신경 쓰였다. 괜히 천러와 걸음 정도 떨어져 지성이 주변을 분주하게 살폈다. 제노 형은 언제 오는 거야.

 제노가 다니는 대학교. 지성에겐 너무 낯설고 불안한 공간이었다. 천러에겐 더없이 반갑고 신기한 공간인 같지만.


 "! 저기 있다!"


 지성이 눈에 힘을 주고 열심히 찾은 보람도 없이, 천러가 먼저 제노를 찾았다. 천러는 분홍 손가락을 잔뜩 제노를 향해 반갑다는 손을 흔들었다. 제노와 눈이 마주치자, 지성도 덩달아 밝게 웃었다. 지성이 발을 옮기기도 전에 천러는 이미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같이 가아. 지성은 저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천러를 쫓았다.


 "제노 !"

 "오랜만이네. 지냈어?"

 "완전 지냈지~ 형은?"

 "나도 완전."

 " 진짜 어른 같다~"

 "맞아요."


 진짜 어른 같아요. 지성은 천러의 말에 덩달아 공감해 버렸다. 지성에게 현장이 낯설었던 이유는 여기 온통, 또래가 아닌, '어른들' 있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제노도 사람이라는 ,


 "야아, 그래... 너희랑 한두 차이밖에 ."

 "알아! 근데, 그래도 제노 어른이야."

 "에이... 천러 너도 내년이면 어른 , 근데 컸다?"

 "그치! 이제 178이야~"

 "178? 그렇게 ?"

 "!"


 ' 컸다' 말을 들으면 티가 나게 좋아하는 천러. 말이 듣고 싶어 안달난 천러. 제노 형이 얘기하지 않았으면 입으로라도 먼저 자랑했을 천러. 어디서 어떻게 쟀는지도 모르게, '178'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천러. 너무 너무 알기 쉬운 천러. 지성은 그렇게 알기 쉬운 천러 때문에, 알기 쉽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지성이 너도... 진짜 많이 컸다."

 "?"

 "맞아, 박지성 완전 . 박지성한테 졌어."


 '졌다' 금방 분한 얼굴을 천러. 이게 대체 무슨 대결이라고 천러만 성을 내고 있었다. 제노는 신기하다는 지성을 올려다 보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저번에도 충분히 크긴 했는데. 때보다 컸네.

  정도예요? 모르겠는데. 지성은 난처하다는 것처럼 웃었다. 난처할 만했다. 그럴 있었다. 단추를 잠그면 어깨가 답답해지는 셔츠 때문에 습관처럼 자세가 구부정 굽었다. 어색하게 짧아져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도 부끄러웠다.





 -


 ", 읽어 ."

 " 읽는 하는데?"

 "그래도 읽어 ."


 제노는 산만하게 움직이는 천러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쥐어 얌전히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직은 집중하지 못한 천러의 고개가 흥미를 잃은 것처럼 기울었는데도, 제노는 천러 앞에 곱게 펼쳐놓은 책을 내밀었다. . 재미없어. 천러는 책에 글자가 많을수록 티가 나게 읽기 싫어했다. 지성은 그런 천러를 알고 있었다. 읽어 보라고 해도 되는데. 천러 원래 한글 읽는데.


 "천러 원래 한글 읽잖아."


 지성의 생각이 제노의 말로 옮겨 갔다. 지성은 제노에게 머리 속이 들통난 알고 흠칫 놀랐다. 맞아. 천러 한글 읽잖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덧붙였다.

 천러는 이럴 아이 같아서, 제노의 말이 무작정 칭찬인 알았다. 이것도 읽을 있지? 하고 추켜 세우면 금방 천진한 웃음이 쫓아왔다. 알겠어, 읽을게. 그러더니 머지 않아 책에 집중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내밀었다. 귀여워. 천러는 이럴 때에도, 아이 같아서,


 "지성이 너는?"

 "?"

 "너는, 여기, ..."


 제노가 그렇게 얼버무려도 지성은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 들었다. '볼일도 없는 애가 여기엔 웬일이야' 라는 뜻이겠지. 천러를 따라 왔다고 했다. 그러면 제노는 다른 의심 없이 , 하는 탄식과 작은 끄덕거림으로 답했다. 그러다 말고 펜으로 지성을 가리켰다. 지성은 지목을 받게 되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근데... 천러 한국어 선생님 원래 너잖아."

 "...?"

 "이제 지성이 아니야."


 이제 제노 형이 선생님이야. 기어코 천러는 그런 말을 내놓는다. 지성이 대답을 하려다 말고 금방 풀이 죽었다. 천러는 모를만큼 조금만 기가 죽었다. 속상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슬퍼. 모든 상황이 흥미로운 제노는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그래, 천러야. 너무 띄워주지 .


 "나도 봉사 시간 얻으려고 하는 거란 말이야."

 "...나도 제노 형이랑 놀려고 하는 건데!"


 천러는 그렇게 받아칠 줄도 알았다. 맞다, 그랬지. 천러는 제노 형을 따르지.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여 웃어 버리는 둘을 가만 지켜보던 지성은 속으로 작게 체념했다. 이상해. 둘이 사이 좋은 , 원래 아는데도, 기분이 이상해.


 "이건 뭐야?"


 천러가 제노의 가방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것을 가리켰다. , 그거. 제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천러는 손을 뻗어 그걸 꺼냈다. 책이었다. 동화책.


 "토끼, , 거북이?"

 "맞아. 읽네."


 과방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제노의 다른 동기들도 했던 봉사 활동. 한국어 과외. 완전한 초보자들은 하나씩 읽어 보았다는 한국어 동화책. 천러가 읽기에는 너무 쉬운 아닌가? 지성은 표지를 문지르는 천러를 따라 저도 표지를 만져보았다. 차갑고 미끈미끈. 천러의 손가락이 먼저 지나간 곳은 차갑고 미끈미끈.


 "읽어봐도 ?"

 "당연하지. 읽어 보라고 가져왔어."

 "우와아,"

 ". 근데 유치할걸?"

 "그래?"

 "천러 유치한 싫어하잖아."


 지성은 얇은 책을 팔에 끼운 천러를 향해 그렇게 말을 슬쩍 내놓은 다음 저만 있을 정도로 웃었다. 습관처럼 천러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천러 내년부터 어른이잖아. 우리 이제 유치한 싫어하기로 했잖아. 지성은 뒤에서 굴러나오는 말은 모두 삼킨 웃기만 했다. 천러가 페이지만에 흥미를 잃고 책을 덮어버릴지 저와 내기 하기로 했다. 천러는 읽어 마음이 있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책을 펼쳤다.


 "옛날 옛날에~"


 어른들이 가득한 공간에 아이처럼 명랑한 천러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미 충분히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공기인데도 제노는 괜히 천러의 허벅지를 톡톡 건드렸다. 눈으로만 읽자. 천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엎어지듯 몸을 숙여 책상에 턱을 기대고 있으면 제노가 천러의 등을 토닥거렸다. 똑바로 앉아야지. 천러는 제노의 말대로 했다. 제노 말은 엄청 듣네. 지성은 고개를 숙여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이상하네. 지성은 점점 저와의 내기에서 지고 있었다. 천러는 생각보다 조그만한 동화책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말을 걸기도, 장난을 치기도 무안할 정도로 집중해 있었다. 뭐야. 재미있나봐. 애기들 보는 책인데. 되게 열심히 보네. 완전 유치하네. 천러가 제일 유치해.


 "이거 무슨 뜻이야?"


  책에만 처박혀 있던 천러의 고개가 들리면, 제노와 지성이 모두 몸을 숙여 천러의 곁에 붙었다. 제노는 선생님이니 그렇다 치고, 지성은 행동에 그럴 듯한 이유가 없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늘보? 느림보? 뭐야?"

 "--."


 느리다고 놀리는 거야. 토끼는 빠르고 거북이는 느리니까. 제노는 동화책에 그려진 동물 그림을 하나씩 가리키며 알기 쉽게 설명을 이어갔다. 제노 형에겐 확실히 '선생님'이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천러가 제노 말을 듣기도 하고. 실제로 제노 형이 천러가 모르는 저렇게 설명해 주기도 하고. 그러면 천러는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다시 책에 빠져들고. 제노 형은 그런 천러를 흐뭇하게 보고 있고. 흐뭇하게?

 잠깐만. 나도 천러를 저렇게 쳐다봤을까? 제노 형도 나랑 마음이 똑같으면 어떡하지? 지성은 저만의 심각한 고민으로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천러는 사이에 책을 읽은 것처럼 고개를 퍼뜩 들었다.


 "...거북이가 이겼네!"

 ", 그게 중요한 아니잖아."


 제노가 다시 눈을 휘어 웃었다. 때문에 살겠다는 웃음. 나도 평소에 저렇게 웃었나? 그렇게 저를 객관화 하려는 시도가 무색하게, 지성은 광대가 이미 눈을 누를 것처럼 올라와 있다는 알았다. 이건 귀여우니까 어쩔 없지. 웃을 수밖에 없지. 우선 그렇게 변명했다. 이런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 두어도 되니까.


 " 동화의 교훈이 뭐야."

 "교훈이가 뭔데?"

 "-. 이거 한자야."

 "한자로 뭔데?"

 "그건... 모르겠고."

 "..."

 "영어로... 레슨? , 수업 말고..."

 "거북이가 이겼지, 천러야?"


 조금 난감해하는 제노 옆에서 지성이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천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입술을 내밀고 눈을 굴리더니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토끼처럼 낮잠 자서! 쉬어서! 계속 열심히 뛰어서! '뛰어서'라는 말에는 천러가 주먹을 쥐고 뛰는 같은 제스처를 했다. 그렇지, 그렇지. 지성은 그런 천러의 모습에 까무룩 웃어 버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천러 똑똑해.


 "맞아, 천러야. 그게 교훈이야. 우리도 뭐든, 잔머리 굴리지 말고, 열심히 하자고."

 "~"


 지성이 길을 열어주면, 제노가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렇구나. , 그렇구나아. 천러의 고개가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가며 기울었다. 뭐야. 이렇게 귀여운 거야. 지성이 그런 천러를 대놓고 봐버릴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제노는 그런 천러가 익숙하다는 눈을 휘어 웃고 있었고. 천러는 사이를 토끼라도 것처럼 폴짝 뛰어 다녔고.





 -


 "지성이는 ?"


 여름이 지나가자 지성의 몸은 기다렸다는 허해졌다. 사실 '허해졌다' 보다는 성장을 감당하지 못해 금방 '지쳐 버렸다' 말이 맞았다. 태풍 때문에 바깥이 시끌한 동안에는 뼈가 늘어나는 듯한 통증이 지성을 꾸준히 괴롭히더니. 해가 들어오고 구름이 비치는, 흔히들 좋아하는 '가을 날씨'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맥진하게 몸이 풀어져 버렸다.


 "밖에 날씨 대박인데."

 [나도 알아. 날씨 대박인 .]

 "...많이  아파?"


 천러가 이런 말을 처음이었다. 이런 목소리를 것도 처음이었다. 설마 천러가 저를 걱정하고 있는 걸까? 그런 적이 없는데. 애초에 제가 천러를 걱정하게 만든 적도 없는데.


 [나가기 귀찮아서 아픈 거야.]

 "거짓말!"

 [거짓말 아니거든. 공포영화 좋아하잖아.]

 "...뭐야."

 [재미있게 보고 .]


  몫까지. 몸살 기운에 맞춰 가득 쉬어버린 목소리는 제가 들어도 웃겼다. , 박지서엉-! 천러는 여전히 듣기 좋은 맑은 목소리로 지성의 이름을 불렀다. 혼이 나는 기분이 들어도 지성은 가라앉은 숨에 웃음을 가득 담았다. 다녀오고. 다음 주에 . 지성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칙칙한 얼굴에 마른 세수를 했다.


 천러는 지금 제노 형과 함께 있다.

 둘은 영화를 보러 갔다. 빼고. 요즘 유행한다는... 이름은 기억 나는 공포 영화.

 일단 바르게 눕자. 이불도 제대로 덮고. 지성은 잠들고 싶었다. 그래야 했다. 의미 없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으려면 잠들어야 했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이미 시야가 까맣게 번졌는데도 까맣게 만들려는 . .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은 휴식을 간절히 원하는데, 잡생각은 끊이질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천러는 제노와 친했다. 제노가 고등학교를 먼저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천러의 곁을 떠나고 나서야 지성은 천러를 독차지 있었다. '독차지'라고 하기엔, 그저 천러의 뒤를 어물쩡 따라 다닌 정도이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충분히 좋았다. 지성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살풋 웃었다.

 아니다. 웃을 때가 아니었다. 천러는 제노와 영화를 보러 갔다. 저만 빼고. 요즘 들어 천러 생각이 머리 속을 잔뜩 구르는 저는, 몸은, 당장 아프고 힘이 없어서 구석에 뻗어 있는데.


 '내가 토끼였으면 낮잠 ! 이겨야 되니까.'


 그랬던 천러의 말이 생각 났다. 딱딱한 동화책 커버를 두드리는 말랑한 손가락이 떠올랐다. 내가 거북이였으면 토끼가 놀릴 가만 있을 건데. 제노의 말도 생각 났다. 다음에 시작된 제노의 장난도, 천러를 향해 도지던 손버릇도 떠올랐다. 작은 몸이 놀라 푸드덕거리도록 간지럽히고, 빨개진 귀도 손가락으로 잡아 당기고. 저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제노 형은 당연한 것처럼 쉽게,


 "머리야..."


 힘겹게 몸을 돌려 누운 지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묵직한 한숨에 맞춰 몸이 침대 속으로 풀썩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면 한숨을 쉬어 오랜만이었다. 아파서 그런 것만은 아닐 테고. 이게 천러 때문이야. 아닌데. 천러 덕분에 한숨 없이 행복하게 지냈는데. 천러는 잘못 없어. 천러 때문 아니야.

 진짜 그만하자. 머리가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그래야 몸이 나아질 기회를 가질 있었다. 자야 . 쉬어야 . 동화 주인공은, 토끼와 거북이 뿐이다. 둘만의 이야기이다. 애초에 저는 수도 없는, 끼어서도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내가 입으로, ' 몫까지' 놀다 오라고 했으니까,


[박지서엉-]


 근데 그래. 나한테 왔어.

 천러가 왔다. 제노와의 영화 약속도 건너 뛰고. 거북이와의 달리기 시합도 잊고, 토끼가 가던 길을 샜다.


 " 왔어."


 인터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말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지성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인 천러의 모습에 내놓은 마디. 왔어.

 오면 ? 조금은 서운해 보이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될 없지만, 그래도 왔어. 지성은 추궁하려다 말고 천러를 집에 들어오게 했다. 현관문 너머의 서늘한 공기에 맞춰, 열이 오른 몸에 으스스한 추위와 함께 소름이 돋았다. 지성은 손으로 팔을 쓸었다.


 "제노 형은?"

 "영화 그거, 다음에 보기로 했어."

 "."

 " 아프니까!"


  당연한 물어보고 있냐는 말투였다. 뭐야, 굳이. 죽을 병도 아닌데 . 지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천러가 와준 것이 내심 기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와중에도 목이 잠겨 잔기침을 해대고.


 "박지성. 먹었어?"

 "... 먹어도 . 쉬면 나아."

 " 먹었을 같아서 일단 이것저것 갖고 왔지!"

 "..."

 "밥은?"

 "...생각  없어."

 "그럴 같아서 이것저것 왔지!"


  중에 하나는 얻어 걸릴 거야.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들고있는 천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얻어 걸린다' 말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는 알려준 없는데, 누구한테 배운 거야. . '누구' 뻔했다. 지성은 빠지는 생각을 붙들고 있을 기력이 없어 비척비척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엎어졌다. 방에 따라 들어오는 천러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이리 오라는 건지, 저리 가라는 건지. 신호를 이해하지 못한 천러가 걸음을 우뚝 멈춘 다음 고개를 갸우뚱 했다.


 "...놓고 . 그러고 가서 영화 ."

 "영화 오늘 본다니까?"

 "그래도 ... 나한테 옮아."

 "뭐가 옮아? 감기 걸렸어?"

 "아니, 그건 아닌데..."


 천러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달고 저와 가까워졌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묻는다. 지성이 기가 차다는 웃으며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너가 무슨 의사야? 베개에 얼굴이 묻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머리도 웅웅 울렸다. 어디가 아픈지 말해 보라니까? 갑자기 가까이에서 들리는 천러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면 그대로 훌쩍 가까이에 천러가 있었다. 제멋대로야. 가까워지는 것도 제멋대로, 걱정하는 것도... ?


 "...천러 걱정해?"

 "?"

 " 걱정하냐구."

 "걱정이 뭐야?"


 뭐야. 제노 형이 아직 말까진 알려줬구나. 지성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아픈 때문에, 기분이 좋으면... 그게 걱정하는 거야."


  오글거리나. 제가 말해놓고도 심했다. 말을 들었을 천러의 반응이 궁금한데, 막상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은 없어 계속 벽만 쳐다봤다. 천러는 적당한 대답을 생각하다 말고 지성의 뻣뻣한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 밀어버렸다. 당연하지!


 "빨리 나아 박지성! 걱정하기 싫어!"

 " 걱정하기 싫어?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한 화법이다. 천러다웠다. 그래서 좋았다. 지성이 푸스스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천러를 향해 돌아 누웠다. 아퍼. 이번엔 다리가 뻐근해서 앓는 소리를 냈다. 다리 아파? 뻣뻣하게 돌아가는 지성의 발목을 구경하던 천러가 지성의 앞에 몸을 쪼그려 앉았다. 작은 등이 둥글게 말리고 동그란 고개가 지성이 누운 쪽으로 꿈뻑 기울었다. 여기? 손이 무작정 지성의 종아리 어디를 붙잡았다.


 "뭐야!" 

 "마사지!"


 지성은 당연한 것처럼 움찔 놀랐다. 상체만 어설프게 일으켜 마저 당황하고 있으면서, 정작 손을 뻗어 천러의 어깨를 어설프게 쥐기만 제대로 아이를 말리지는 못했다. 천러는 손가락 끝에 제법 힘을 주고 지성의 다리를 꾹꾹 눌렀다. 가만 있어 . 이렇게 하면 나을 수도 있잖아.


 "...무슨, 어우,"

 " 괜찮지 않아?"

 "모르겠는데..."


  ! 천러는 특유의 다그치는 목소리와 함께 지성의 다리를 주먹으로 , 쳐버렸다. 알겠어. 지성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천러의 말을 따랐다.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른다고 했는데. 그냥 무리하지 말고 쉬라고만 하던데. 지성은 그렇게 투덜거리려다 말았다. 천러가 손가락을 꼬물꼬물 굴려가며 하는 '마사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노 형이, 그거냐고 하던데."

 "그거? 그게 뭔데?"

 "... 뭐였지? , 상장통?"

 "성장통?"

 ", 그거! 커서 아픈 ."

 "...나도  모르겠어."

 "..."

 "근데 키가 크긴 했지."


 지성이 뿌듯하다는 턱을 치켜들고 웃어 보였다. 이럴 때엔 영락 없이 어린 티가 났다. 천러는 그런 지성의 어깨를 , 밀었다. 박지성 허세 왕이야. 키만 . 키만 박지성 이겨. 흘겨보는 눈에 짜증이 가득하다. 아직도 천러는 자기만의 대결에 열중해 있다. 둘은 서로만큼 어리고 유치했다.

 지성보다 키가 작아서, 길이로 분한 건지, 천러는 마사지를 하다 말고 침대 위로 고개를 묻어버렸다. 모습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지성이 공기를 가득 담은 웃음을 웃으며 무의식적으로 천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빨갛게 물들어 있는 귀도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런 자극은 생소한 천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 만져! 그렇게 추궁하자 지성도 말이 없어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게. 만졌지.


 "... 귀가  빨개졌길래."

 "빨개? 보여."

 "...그래, 보이겠지."

 "몰라! 빨개지라고 없는데!"

 "그래 그런 없겠지!"


 뭐야, 종천러. 지성은 천러의 말이 웃겨 기어코 넘어갔다. 신호등도 아니고. 빨개지라고 하면 불이 들어오냔 말이야. 웃다가도 목이 아파 작게 기침했다. 침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천러가 지성의 반응을 꼼꼼하게 올려다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지성은 이불이 만드는 사라락 소리에, 천러의 자그만한 손장난에, 웃는 멈추고 천러의 귀를 마저 건드려 보았다. 천러가 답지 않게 움찔 놀랐다. 지성은 이상하게 침착했고.


 "...신기하다아."

 "..., 만지지 !"


 뭐가 마음에 드는 건지, 간지러운 적응이 되는 건지. 천러가 돌연 고개를 멀리 떼어냈다. 천러를 따라 당황한 지성이 허공에 머물러 있는 손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 미안. 사과하는지도 모르고 사과했다. 그러면 천러가 열을 냈다. 이런 걸로 사과하지 말란다. 이게 무슨 말이야. 지성이 반응할 틈도 없이, 궁금해 정신도 없이, 천러가 빨개진 귀를 양손으로 숨겼다. 그냥 만지지나 .


 "...만지면 빨개진단 말이야."


 지성은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같았다. 천러가 토끼 나오는 동화책을 읽더니 진짜로 토끼가 걸까. 말도 되는 저만의 생각이 시작됐다.

 귀를 가린 손끝도 빨간데. 어색함을 깨버릴 말도 않고, 그저 저를 올려다 보기만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데. 낯선 천러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자니, 지성의 머리는 그렇게 아플만 했다.


 "어떻게 알아. 너는 보인다며."

 "..."

 "그리고 천러야,"


  만져도 빨개지는데?

 무슨 말로, 어떤 반응으로 천러의 뒤를 쫓아가야 하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가지는 있었다. 제가 지금 토끼의 경주를 방해하고 있다는 정도는.


 



 -


 "지성이는 !"


 그런 날이 있었다. 유독 일이 뜻대로 풀리던 .

 하필 오늘. 거울 앞에서 면도하던 지성의 손이 미끄러져 보기 좋게 턱이 베였다. 아침부터 피를 봤고. 최대한 작은 밴드를 붙이고 나갔는데도 천러한테 들켜서 놀림 받고. 천러가 지성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기로 했는데 나간 얼마 되지 않아 벌써 꾸물꾸물 날이 흐리기 시작했고. 성장통이 다시 지성을 괴롭히는 종아리와 발목이 뻐근하게 아프기 시작했고. 몰래 다리를 저는 천러에게 바로 들켰고. 혼이 나고. 거기까진 괜찮았다. 천러가 혼을 내도 별로 무서웠다. 사실 좋았다. 잔뜩 혼이 나고 나면, 천러가 같이 병원에 거니까.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천러가 지성을 부축해 주려는 자꾸 몸을 붙였다. 천러의 손가락이 꼬물꼬물 움직이며 지성의 목이나 어깨를 꾸준하게 건드렸다. 지성은 바짝 긴장해 몸을 통나무처럼 굳히고 있었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혼자 걸을 있다고 하고. 천러가 빼라고, 저한테 기대라고 하는데도 지성은 말을 듣고.

 결국 팔짱을 끼는 것으로 합의 봤다. 적응이 되긴 하지만 그나마 괜찮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둘은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같은 것을 떠들면서 킥킥 웃었다. 웃음을 건드린, 사이를 갑자기 파고든 사람이 있었다. 제노였다. 잠깐 틈이 벌어진 사이로 훌쩍 끼어든 제노가 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반가운 티를 냈다.


 "너희 어디 ? 바빠?"

 "? 아니 별로,"

 "! 우리 바빠!"


 체중이 실려 작게 휘청거린 지성은 금방 제노의 품을 벗어났다. 천러는 여전히 제노에게 붙잡혀 몸이 둥글게 말려 있었다. 천러 너는 바쁜데. 어디 가는데. 제노는 익숙한 것처럼 천러를 간지럽히고, 천러는 고개를 젖혀 웃으며 제노의 간지럼에 빠짐없이 반응했다

 천러가 대답을 제때 못할 같아 지성이 대신 입을 열려고 했다. 천러 저랑 같이 병원 가기로 했는,


 " 먹으러 갈래?"


 제노는 지성의 입이 뜨이기도 전에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았고, 천러는 전에 없던 표정으로 제노를 쳐다보았다. 제노가 알고 있는 술집에 건데, 민증 검사를 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거기엔 지금 천러가 법한 선배 형들도 많다고 하고.

 천러의 눈이 점점 커진다. 티가 나게 밝아지는 모습 그대로 지성과 눈이 마주쳤다. 가고 싶다는 건지, 가기 싫다는 건지. 후자일 리는 없구나. 표정은 당연히 '예스'. 지성은 눈치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갔다 , 천러야."


 지성은 분명 그랬다. 입으로 그랬다. 사실 지성이 천러의 일에 어떤 의견을 내놓고 간섭하고... 허락할 자격은 없지만. 무턱대고 애한테 '다녀오라' 해버렸다

 그럼 천러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괜히 속상하게. 지성이 바닥 쪽으로 고개를 숙여 작게 아픈 발을 굴렀다. 여전히 발목 어딘가가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천러는 오케이. 그럼 지성이는?"

 "지성이는 !"


 지성이 병원 가야 . 천러가 그랬다.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그랬다. 천러가 지성을 걱정하고 내고 간다고 하고... 허락 자격은... 있었다. 완전 있었다.

 그리고 지성은 천러의 말을 당연하게 듣는 사람이다.


 "강도 괜찮으세요?"

 "? ... ..."


 지성은 천러의 말을 들었다. 아주 고분고분. '아프지 ' 하면 아프려고 나름 노력도 하고. '병원 가자' 하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긴 하고. 이렇게 혼자서도 병원에 오고.

 열여덟의 성장통에 뚜렷한 처방이 필요한 아니었다. 그저 무리하지 말아라, 가끔 물리치료 받아 보자, 하는 애매한 소견이 전부였다. 말대로 지성은 지금 물리치료를 받으러 왔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하게 낮추었을 기계의 강도도 이상하게 오늘은 받을 만한 같고. 병원 침대가 작아졌는지 불편하고. 제가 그만큼 자랐다는 생각 하고.


 지성이는 .

  말이 계속 맴돌았다. 뒤에 곧바로 '다음에 보자' 하고 인사하던 제노 형의 모습도. 옆에 있던 천러를 뺏어간, 아니 뺏어간 아니라... 그냥 데려갔지. 천러는 자기 발로 따라 거지. 그리고 내가 가라고 했지

 괜히 그랬어. 천러랑 같이 병원 왔으면 좋았을텐데. 아니야. 내가 가지 말자고 했어도 천러는 갔을 거야. 그래. 내가 뭐라고. 지성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지성은 유독 생각이 많았다. 영양가 없는 잡생각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그런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고. 이젠 슬슬 싫어질 법도 한데.


 다른 생각을 해보자. 새로 오신 과학 선생님의 말투를 떠올려 보자. 괜히 속으로 따라해보고 놀리자. 친구들끼리 책상을 두들기며 했던 게임에서 유독 재미있었던 장면을 다시 곱씹어보며 웃어버리자. 근처를 지나다니던 대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다들 어른 같았는데.

 나도 어른이 되면 무엇을 할지 생각하자. 듣던 노래부터 들을 거야. 복권도 사야지. 술도 마실 거야. ? 천러는 지금 마시러 갔는데. 제노 형이랑 같이. 무슨 술을 마셨을까. 술이 달고 맛있다고 생각할까, 쓰고 맛없다고 생각할까. 천러는 취하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귀여운데, 귀여워지면 어떡하지. 형들이 놀리고 괴롭히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천러 생각하지 말자. 그만 생각하자.


 " 되셨어요."


 뻣뻣한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손길에 움찔 놀라버렸다. 부끄러울 정도로 모션을 만들며 놀라느라 침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에 붙은 것을 떼고, 기계 선을 정리하는 어른은 그런 지성이 재미있는지 웃었다. 잤나봐요? 뻗친 머리를 정리하는 지성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잤는데. 잤는데. 천러 생각하느라 숨도.


 "지성이다!"


 지성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천러는 예상보다 했다. 천러는 취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술이 들어간 사람의 일반을 나타내는 같으면서도 정작 주인공이 천러인 것은 그것대로 적응이 되고 낯설었다.

 얼마나 마신 거예요? 지성이 아주 조그만한 불만을 담은 목소리로 제노를 추궁하려 했다. 제노는 자기도 모른다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마셨어. 마시려는 것도 엄청 말렸어. 점점 취하는 같아서 아예 데리고 나왔어. 제노는 제가 있는 나름대로 같았다.


 "지성 아이스크림 먹을래? 줄까?"


 천러는 그렇게 물어보더니 이미 빨아먹은 막대를 내밀었다. . 먹었네. 풀린 눈과 벌어진 입술이 바보처럼 웃었다. 지성은 천러를 따라 바보처럼 웃었다. . 웃다 말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지성은 머리보다 손이 빨랐다. 앞에서 휘청거리는 천러를 일단 손으로 붙잡았다

 어떤 용기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잡은 천러의 팔을 힘주어 당겼다. 제게 기댈 있게. 의지할 있게. 없이는 아예 걷는 것을 잊어버리게. 그대로 팔에 팔짱을 끼게 했다. 가자, 천러야.


 ", 가볼게요."

 "제노 혀엉, 빠바이-"

 ", . 천러 빠바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천러의 팔을 다시 끼웠다. 신발 뒤축이 아스팔트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천러야, 똑바로 걸어. 그러다 넘어져. 그럴 없이 제가 붙잡고 있는데도 지성은 괜히 그렇게 천러를 혼내 보았다. 천러가 어이 없다는 고개를 숙여 웃었다. 바보야. 지금 제대로 걷고 있거드은. 너나 똑바로 걸어. 지성은 천러에게 바보 소리를 듣고도 바보 웃음을 웃었다. 뻔뻔한 술이 취해도 똑같구나.

 천러의 몸이 자꾸 앞으로 기울었다. 지성이 팔짱을 어색하게 풀며 잠깐을 망설였다. 그래. 어쩔 없어. 손으로 천러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면 천러는 기다렸다는 자기 팔을 지성의 등에 둘렀다. 진작 이렇게 할걸. 이러니까 한결 데리고 가기 수월해졌다. 비록 얼굴에서는 불이 나는 같았지만. 몸도 이유 없이 긴장하고 있지만.


 "근데 천러야. 그냥 형들이랑 만나서 노는 아니었어? 마셨어."

 "바보 아니야? 술집에 갔는데 놀기만 ?"

 "그렇긴 한데. 조금이 아니라 많이 마셨잖아. 아직 어른도 아닌데, 성인도 아닌데."

 " 열아홉 살이야! 중국에선 어른이야!"

 "근데 여긴 한국이잖아."

 "나는 중국인이잖아!"

 "그래도 여긴 한국이야!"

 "그럼 ! 중국 갈까?"

 "...아니."


 그러지는 말고. 술에 취해도 천러는 천러였다. 목소리를 내보아도 지성은 지성이었다. 지성은 말로 천러를 이길 없었다. 그래도 별로 분하지 않았다. 아니. 이번에는 조금 분하다.


 "...천러 바보."

 "? 내가 바보야!"

 " 취했잖아. 마신 천러는 바보야."

 " 취했어! 없어도 걸어! 이거 !"


  잡지 ! 천러가 돌연 지성의 곁에서 벗어나 훌쩍 뛰기 시작했다. 야아, 어디 ! 지성이 잔뜩 당황한 모양으로 천러를 쫓아가면 천러는 그게 재미있는지 잔뜩 웃었다. 그러다 넘어져, 뛰지 ! 지성은 꾸준히 천러를 걱정하고, 곁에서 멀어지는 발만 쳐다봤다.

 천러는 제가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골목길을 뛰는데도, 지성은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금방 천러를 따라 잡았다. ! 지성에게 뒤가 붙잡힌 천러가 웃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목소리를 만들었다.


 "천러야, 소리 내면 , 지금 밤이고, 사람들 자다가 놀랄 수도 ..."

 ", 박지서엉..."

 "?"

 " 뛰는 , 그렇게 , ?"


 힘들어... 천러가 헥헥거리며 지성의 앞에 주저앉았다. 어어. 지성도 천러를 따라 주저앉았다. 천러 괜찮아? 숙인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빨개진 귀도 만져볼까 고민하는 사이에 천러가 먼저 고개를 들어 지성을 올려다 보았다.


 "... 자꾸 이겨?"

 "..."

 " 너한테 지기 싫은데."


 처음 보는 천러의 표정이 있었다. 느리게 감겼다 뜨이는 , 축축하게 벌어진 입술. 처음 듣는 천러의 말이었다. 내가 언제 너를 이겼다고. 저도 모르게 저와 무슨 대결을 거냐고

 도무지 이해할 없는 , 대체 어떤 의미인지 모를 표정에 잠깐을 고민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이건 무슨 표정이야, 하고. 지성은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다만 그럴 자신은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장 천러와 눈이 마주치는 것부터,


 "일어나, 천러야."

  "..."

"...일단 집에 가자."





 -


 어디서 그런 침착함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취했으니까. 취한 사람이니까. 어른 흉내를 , 어린 친구이니까. 그럴 듯한 변명을 굴리며 지성은 천러를 얌전히 집까지 데려 왔다. 천러가 중간중간 느슨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데도. 제대로 대꾸하지도 않고.


 "천러, 신발 벗어야지."

 "알아..."


 알면 . 어이 없다는 웃음을 웃는 지성이 천러 옆에 쪼그려 앉아 천러의 발목을 쥐었다. 박지성 바보. 천러는 괜히 그렇게 말하며 지성의 등에 손을 얹어 체중을 실었다. 전보다 넓고 단단해진 지성의 등은 천러 만큼의 무게가 실려도 끄떡 없었다. 보란듯이 누르고 기대어도 꿈쩍 않는 몸은 천러의 신발을 벗기는 일에 열중했다.

 더워. 더워. 그렇게 중얼거리며 겉옷을 벗어던진 천러를 눈으로 쫓던 지성이 작게 탄식했다. 걸음 가지도 못하고 다시 쪼그려앉아 천러가 벗어놓은 옷을 주워들었다. 그래. 천러 취했으니까. 그럴 있어. 취한 모습 구경하는 재미있어. 귀여워. 귀여우니까 봐주자.


 ", 박지서엉-"

 "왜애."

 " 머리 대박 무거워."


 침대 위에 엎어진 동그란 뒤통수가 꼼질꼼질 구석으로 움직였다. 지성의 허벅지와 무릎 어디에 닿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지며 천러의 고개가 돌아갔다. 머리 얼마나 무겁게. 반사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정리해주는 지성의 손에 천러가 보란 듯이 머리를 얹어 기댔다. 키로는 되는 같지. 말도 되는 소리를 내놓으면 지성이 고개를 젖혀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별로 무거워.

 지성이 침대를 벗어난 천러의 머리를 붙잡아 다시 제대로 뉘여 주면 이번엔 천러의 팔이 침대 밖을 벗어나 바닥 쪽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토끼는 손이 많이 가네. 다시 앞에 다리를 접어 앉은 지성이 천러의 팔을 붙잡았다. 얇은 반팔 차림이라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다. 머리보다는 훨씬 무거운 같은, 팔을 쥐어 들어올렸다. ,


 " 이거 뭐야."


 천러의 팔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모기 물린 거야? 그건 아닌 같고. 요리조리 살펴보며 천러의 어깨를 흔들면, 잠깐을 잠들어 있었던 건지 천러가 눈을 느리게 껌뻑거렸다. , 이거어?


 "제노 형이랑 놀아서 그래."

 ", 하고 놀면 이렇게 되는데?"


 이상한 생각이 튀어나올 뻔한 참았다. 다행히 천러는 지성이 당황한 알아채지 못한 푸스스 웃으며 누운 자세를 고쳐 편하게 늘어졌다. 꼬집는 놀이. 아픈 참는 놀이. 소리 지른 사람이 마셔야 되는 놀이. 지성이 도무지 이해할 없다는 얼굴을 했다. 뭐야...


 "무슨 그런 놀이를 ?"

 "그냐앙, 재미있잖아-"

 "그래도... 이게 뭐야, 자국 생겨서."

 "놔두면 없어져!"

 "...네가 이겼어, 졌어?"

 "몰라, 기억 ."


 근데 나도 많이 꼬집었어. 제노 아프다고 울었어. 제노 눈물 봤어. 천러가 뿌듯함을 가득 달고 지성을 향해 웃어 보인다. 그랬구나. 천러만 괴롭힘 당한 거였으면, 마음에 뻔했는데.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천러의 다리에 눌려 있는 이불을 빼낸 지성이 괜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그래도 마음에 들어.


 "그래도 제노 나빠."

 "... 꼬집어서?"

 ". 그리고 취하게 하고, 툭하면 간지럽히고."

 "...맞아. 제노 나빠."

 "..."

 "그리고 지성이는 착하고!"


 천러가 위로 이불을 덮어주는 지성에게 팔을 뻗더니 돌연 지성의 볼을 꼬집었다. 몸이 자라더니 얼굴에 붙은 젖살도 많이 빠져서. 예전처럼 꼬집는 맛이 나진 않았지만. 천러에게 순순히 볼이 꼬집힌 지성이 익숙하다는 웃었다.

 그래. 제노 나쁘고. 나는...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착하고. 착하다 치고.

 그리고 천러는 취했고. 취한 천러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고,


 "지성이는 어른 아니야?"

 "?"


 천러의 말에 잡생각을 이어가지 못한 지성이 놀랐다. ? 하고 벌어진 입이 바로 닫히지 못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아까도 그렇고. 천러는 부쩍 이상한 말을 내놓는다. 나보다 1 늦어. 1 기다리게 .

 도톰한 입술이 쪼물쪼물 움직인다. 입술은 그렇게 . 답지 않은 행동도 늘었다. 천러가 요즘 이럴까. 지성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진 천러의 모습과 말투가 싫지는 않았다. 가득 웃어버렸다.


 ", 천러야? 어른 되면 뭐가 달라져?"

 ". 지성이 어른 되면 내가,"

 "으응, 너가,"

 "...지성이 잡아 먹어야지."

 ", 잡아먹혀?"


 뭐라는 거야. 천러의 말에 꾸준하게 웃어 넘어가던 지성의 고개가 결국 얇은 이불 위로 꺾였다. 잡아 먹는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걸까. 모르고 하는 거면,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런 소리 하면 어떡해. 근데 알고 말하면... 그것도 그거대로 위험한데.


 "그런 함부로 하면 ."

 "함부로 했어! 완전 진심이야!"

 ", 진심이야?"

 "!"

 "...그럼 빨리 어른 돼야겠네."


 천러한테 잡아 먹히려면. 분명 우리는 위험한 말을 주고 받는데, 서로의 입에서 오해가 다분한 말이 굴러 다니는데. 이상하게 지성의 입술에서는 웃음이 계속 새어나왔다. 천러는 웃음을 재촉하는 다시 팔을 뻗어 지성의 볼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성은 천러에게 얌전하게 만짐 당하면서도 어딘지 쑥스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천러의 손가락이 지성의 턱에 붙은 밴드 표면도 쓸었다. 면도 하다 다친 박지성. 수염 나는 박지성. 남자 박지성. 천러가 그렇게 놀리는 아직 면역이 되지 않았다. 그래애. 지성이 말랑하게 추궁하면 천러도 말랑하게 웃어주었다.


 "다친 아파?"

 ". 별로?"

 "아프면 해줘야 되는데."

 "?"

 "제노 형이 그랬어. 아프면 해주는 거래."


 제노 형이 대체 가르쳐 주는 건지. 지성은 얼굴 근처를 지나다니는 천러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해주면 . 말에는 천러가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 지성은 '아무' 아니란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닌 같아.


 " 하는 유치하잖아. 애들이나 하는 거야."

 ", 그거 유치한 거야?"

 ". 천러 그런 싫어하잖아." 


 어른이 되고 싶은 천러. 유치한 싫어하는 천러. 그런 작년에 때려친, 유치한 일은 벌써부터 졸업한 천러. 무조건 멋있고 있는 하고 싶은 천러. 알기 쉬운 천러. 너무 너무 알기 쉬운,


 "아닌데."

 "?"

 " 그런 싫어하는데."

 "..."

 ". 이리 ."


 말로는 지성이 오게 만드는 같은데, 정작 천러는 본인이 지성에게 가까이 갔다. 침대 바닥에 몸을 구겨 앉은 지성은 자세가 불편한 것도 잊었다.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을 만드는 천러를 아주 잠깐 궁금해했다. 물음표를 만들 틈도 없이 사이가 잔뜩 가까워졌다.

 뭐야. 이렇게 가까이 거야. 이러다간 숨이 닿을 같았다. 아니, 숨은 이미 닿고 있었다. 차분하고 무거운 숨이 사이를 굴러다녔다. 이제는 말고 다른 것도 닿을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천러를 적은 없는 같다. 눈을 마주 자신은 없었고. 눈을 아예 깔고있는 것도 이상했다. 입술을 보기로 했다. 도톰하고, 붉게 물들었고, 약간 벌어져 있고, 사이에는 가지런한 이도 있고.

 몰랐는데, 여태 생각 해봤는데. 천러의 입술을 많이 좋아하는 같다.

 

 "...근데, 기다려."


  기다린다는 건지. 물어보기도 전에 닿았다. 숨만큼 따뜻하고, 기분만큼 말랑거리는 닿았다. . 이거 뭐야. 지성은 바보가 같았다. 천러가 그렇게 꾸준하게 놀리는 '바보'라는 말에 들어맞는 사람이 같았다. 짧은 정적을 견디고 떨어지는 천러의 입술을 이번엔 지성이 다시 쫓아갔다. 진짜 바보는 아니었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궁금한 알아야 했다. 알아차린 만큼 좋아해야 했다. 와아. 이거 뭐야

 색종이에 풀을 바르듯, 꼼꼼하게 입술을 물었다. 여태 쉬는 법을 잊고 있던 천러가 먼저 고개를 기울였다. 그대로 가쁜 숨을 담고 있던 입술이 벌어지면, 지성도 움직임을 쫓았다. 글로만 읽어보던, 말로만 들었던, 머리로만 상상했던 실제로 보고 있었다. 신기해. 이상해. 나쁘지 않아. 마음에 들어. 좋은 같아. 좋아

  기다린다니. 천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같다. 천러는 어른이 되면 이런 해보고 싶었구나. 내가 어른이 때까지 기다리려 했던 거고. 물론 실패했지만. 당장 술부터 마셔 버렸지만. 취해 버렸지만. ?


 "천러야,"

 "..."

 " 취했어."


 지성은 덜컥 겁이 났다. 천러의 안에서 나는 잔잔한 맛으로 맛을 짐작해 보다가, 무겁게 기우는 천러의 뒤통수를 살짝 붙잡으며 고개를 꺾다가, 눈을 감아 보이지는 않지만 빨개졌을 분명한 귀도 만져 보다가, 문득 겁을 먹고 고개를 뗐다. 취했어, 하는 글자에 천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취한 천러는 바보라니까. 지성은 그렇게 천러를 놀리려다 말았다. 술이 다음날이면 천러는 분명,


 "... 깨면 후회하겠다."

 "후회? 그게 뭐야?"

 "..."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고르던 천러가 느릿한 속도로 말을 꺼냈다. 취했어도 궁금한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지성이 이불 위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 '그러지 말걸' 하는 기분."

 "...그러지 말걸?"


 . 지성이 낮은 목소리의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렸다. 천러를 보내주지 말걸. 천러가 취하게 두지 말걸. 취한 천러가 저에게 뽀뽀하게 하지 말걸. 저도 좋아서 아예 키스까지 해버리지 말걸. 이런 후회의 몫은 지성의 것이었다. 천러가 가질 후회의 몫은 지성의 것보다 크고, 버거울 거였다.


 "내가 후회해? 너랑... 그렇게 해서?"

 "...그렇지 않을까?"

 "..."

 "..."

 "너는 후회해?"


 천러의 눈빛은 느슨한 반짝거렸다. 호기심 만큼의 확신이 가득했다. 전까지 물고 붙어있던 천러의 입술이 벌어져 있었다. 이젠 눈도, 입술도 쳐다보겠다. 지성은 더는 피할 데가 없다고, 피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셨어."


 지성은 후회할 없었다. 후회하기 싫었다. 그건 천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어느덧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같다.

 유치한 싫어하기로 했는데. 어른처럼 굴기로 했는데. 아이처럼 웃어버렸다. 유치하게 고개를 비비며 서로에게 칭얼거렸다. 입술이 다시 붙었다. 빠듯하게 기운이 도는 천러와 그걸 꼼꼼하게 쫓아가는 지성이 나쁜 것도, 불확실한 것도 모두 잊었다. 좋은 것만, 확실한 것만 남겼다. 그것만 붙잡았다. 안았다.


 열여덟의 성장통에 뚜렷한 처방이 필요한 아니다. 뜻도 모른 앓고, 능숙함을 모른 허술하다. 어른들이 많은 낯선 공간에 발을 들여 보기도 하고. 빠르게 커버리는 몸을, 당황스러운 성장을 감당하지 못하기도 하고. 허술하게 면도하다 턱이 긁혀 보기도 하고. 술에 취한 친구가 내놓는 이상한 말에 아이처럼 당황했다가, 어른처럼 침착해지기도 하고. 둘다 어른이 되기 전에 입술을 가만 두지 못하고. 그래도 후회하지 않고. 그러지 않아도 되고.

 아픈 다리를 주물러 주고, 간질거리는 마음에는 '' 하고 입김을 불어주는 같고. 저를 걱정할 줄도 알고, 알고보면 유치한 것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천러. 더는 쉽지 않은 천러. 도통 없는 천러. 이젠 아예 모르겠는 천러. 대박 어려운 천러.

 지성은 그런 천러와 함께 하고 있었다. 열여덟의 성장통을 빠듯하게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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